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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일제 근대교육의 우등생… 식민지배에 균열 일으키다

⑪유진오(兪鎭午, 1906〜1987)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초안 작성에 기여
교육자‧법학자‧정치가로서 근현대사 여러 영역에 족적
학력 엘리트의 빛과 그늘…‘평가’보다 ‘이해’의 대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참되어서 힘차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말을 1948년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새겨 넣은 이는 누구일까. 물론 헌법 제정은 우리 국민 총의의 산물이지만 입헌 정신을 우리말로 뚜렷하고 간결하게 다듬어 법의 형태로 만들어낸 이로 우리는 유진오라는 인물을 기억한다. 
 

그 이름은 헌법 제정의 국면에서만이 아니라 근현대사의 여러 영역, 여러 장면에서 보다 다채로운 이미지로 등장한다. 예컨대 그는 일제시대 조선 내에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이 창설될 때 그 예과에 최초로(1924년) 수석 합격했고 법문학부를 수석 졸업한 명민한 수재로 근대 최초의 학력엘리트라 부를만한 존재였다. 그것은 일제시대 조선인들에게는 긍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주목받는 작가이기도 했다. 식민지배 하에서 지식인의 번민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김강사와 T교수’(1935년) 뿐만 아니라 ‘창랑정기’(1938년) 등 빼어난 단편소설, 그리고 여러 수필들을 써서 근대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법 제정으로 우리 사회 현실에 미친 실제적 영향 또한 광범위하다. 해방 이후 헌법 기초 작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제1공화국 하에서 그는 법제처장의 중임을 맡아 대한민국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법률들을 직접 정비했다. 갓 태어난 신생 국가에 불가결한 법적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내는데 그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를 대한민국 국가의 설계자 중 하나로 불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험난한 한국 현대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족적을 든다면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개헌’ 문제로 이승만 대통령과 정면으로 격돌한 일, 그리고 1960년대 말에 야당 신민당의 총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시도에 대한 저지투쟁이 으뜸에 놓일 것이다. 그는 연구실과 강단에 안주하는 창백한 지식인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살아있는 거대권력과 맞서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간단한 이력과 함께 떠오르는 유진오라는 이름은 분명 빛나고 있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어둠도 짙은 법인가? 권력체제는 그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식민지배 말기에 “우리들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되어 미영(米英) 격멸을 위하여 불타고 있다”는 식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글을 언론에 싣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협박과 강요에 의해 시작된 어쩔 수 없는 일탈이었을지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 얼룩들은 훗날 그의 이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실리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의 활동 역시 늘 빛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는 있겠으나, 자유민주주의자로서의 그의 이념과 상반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5.16 이후 등장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의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최고책임자로 일하기도 했고, 1980년대 제5공화국 하에서는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돼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동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은 유진오라는 이름에 깃든 어두운 그늘인 셈이다.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능력을 기울여 헌신했고, 또 가장 크게 성공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교육이다. 이른바 ‘민족고대’라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회자되는 바, 영예로운 역사를 만들어온 고려대의 발전은 유진오를 빼놓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1930년대 초에 인촌 김성수의 부름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발을 들인 이래 이 학교의 역사와 늘 함께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총장으로서 고대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삶이 위인전에 실릴 만큼 고결하며 타인의 귀감이 되는 것이었다고 상찬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삶을 친일 대 반일과 같은 거친 잣대를 들이대 평가한다면 우리는 앙상하고 강퍅한 도덕적 교훈밖에 갖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삶을 상찬이든 비난이든 함부로 ‘평가’하기보다는 그가 받은 교육과 그가 살았던 시대라는 맥락에 비추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 시도하고 싶다. 그가 받은 교육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는 1906년 유치형(兪致衡)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가문인 기계(杞溪) 유씨 집안 출신으로 1895년 최초의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했던 인물이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수학했고, 이후 도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입학해 3년간 근대적 법률을 공부한 후 귀국해 관료 및 법률교육자로 활동한 우리 사회 최초의 근대적인 법률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러니 유진오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진취적이고 근대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대교육에 신속하고 기민하게 적응했다. 1914년에 경성의 재동보통학교에 진학해 4년간 공부한 후, 1919년에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졸업과 동시에 그는 당시 신설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응시, 조선인 일본인을 통틀어 최고성적으로 입학했다. 그가 받은 교육은 식민교육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안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지 않았다. 유진오는 말하자면, 일본인보다도 일본어를 더 잘 하는 식민교육의 우등생이었던 셈이다.
 

학력(學歷)과 학력(學力)을 통해 엘리트로서의 자질과 자격을 스스로 입증한 유진오는 지배자의 시각으로 보면, 잘 키워서 지배의 협력자로 포섭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동시에 일본인보다도 우수한 수재였던 그는 문명화된 일본인이 미개한 조선인을 지배하고 교화시켜야 한다고 하는 식민지배논리를 뒤흔들 위험성도 동시에 지닌 양가적 존재였다. 지배집단은 그의 정치적 위험성은 거세하면서 동시에 체제 안으로 순치시켜가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진오는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재학 중에 ‘고등문관’ 시험에 응시하도록 집요하게 대학 당국으로부터 종용받았다. 
 

그의 능력이라면 필시 순조롭게 합격해 군수, 도지사 등으로 이어지는 식민관료로서의 출세 길을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총독부 당국까지 나서서 제대 졸업 후 판사로 ‘특별임용’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역시 거부했다. 식민지배 권력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당시로서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일본인에게조차 선망의 대상이었던 직위, 명예와 보수가 보장되던 직장인 남만주철도회사, 즉 ‘만철’의 조사부에 특별채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역시 거절했다. 대신에 연구와 교육,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직을 원했으나 식민당국은 그것을 허용하지 못할 만큼 옹졸하고 차별적이었다. 학생의 신분을 벗고 교육자, 연구자로서 독립한 그가 도달한 곳은 당시로는 초라하고 옹색했던 사립학교, 보성전문학교였다.
 

그의 교육적 이력은 식민교육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하자면 그는 일제 식민교육의 ‘적자’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삶이 그를 가르치고 교육시킨 지배자의 의도대로만 주형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물론 그의 주체적 선택과 결단에도 한계가 없지는 않아 황민화체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친일활동이라는 지우기 어려운 오점을 남기기도 했으나 동시에 해방된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 체제를 만들어낸 이도 그였다. 식민교육 엘리트의 이러한 두 모습을 단지 지식인의 카멜레온적 양면성으로만 치지도외해도 좋은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복합성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의 근대는 외세의 개입과 압력이라는 타율적인 요인에 자극받아 시작될 수밖에 없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라는 일그러진 자장 속에서 그들에 의해 ‘번역’된 근대로 식민지 학교에서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근대가 제국의 지배자들이 교사가 돼 식민지 피지배자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근대인 한, 그것은 ‘식민지적 근대’라 불러도 좋을 것인데 유진오는 식민지적 근대의 으뜸가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적으로 왜곡된 근대교육은 놀라운 역설적 현상을 유발한다. 지배의 유지를 목적으로 했던 교육이 거꾸로 지배에 균열과 모순을 일으키는 반격을 유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협력 메커니즘의 역설’을 떠올려 보자. 제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피식민자들 중에서 선별된 현지 협력자들에 부분적으로 의존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데, 이 선택된 협력자들은 한 때는 식민지 지배에 순응해 그것을 유지‧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에는 지배자들을 물리치고 그들 자신이 새로운 체제의 운영자를 자임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나서게 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유진오의 삶은 이런 협력 메커니즘의 역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삶과 교육은 식민교육의 ‘양날의 칼’과도 같은 양면성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를 문학적인 비유를 통해 설명해보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는 반인반수의 야만인 노예 캘리반과 그를 가르쳐 인간으로 문명화시키는 주인 프로스패로 간의 지배-피지배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장면이 등장한다. 프로스패로는 캘리반을 순량한 인간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 그에게 언어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 언어를 배운 캘리반이 어느 날 이렇게 주인에게 대드는 것이다. “네가 내게 말을 가르쳤지. 덕분에 나는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됐어.” 캘리반의 일갈이야말로 유진오의 교육과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교육자들에게는, 타협 대 저항과 같은 역사의 천칭 위에 유진오의 삶을 함부로 올려놓고 재어보는 이분법적 평가의 앙상한 도덕적 결론보다는, ‘교육’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영위가 지닌 신비하고 복합적인 역설을 보여주는 예로 유진오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갖게 되는 새로운 통찰 쪽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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