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9 (월)

  • 구름많음동두천 24.5℃
  • 구름많음강릉 21.6℃
  • 박무서울 25.2℃
  • 흐림대전 23.3℃
  • 박무대구 22.5℃
  • 흐림울산 22.7℃
  • 박무광주 23.0℃
  • 박무부산 23.2℃
  • 흐림고창 22.8℃
  • 흐림제주 21.8℃
  • 구름많음강화 21.9℃
  • 흐림보은 23.1℃
  • 흐림금산 21.8℃
  • 흐림강진군 22.2℃
  • 흐림경주시 22.4℃
  • 흐림거제 23.1℃
기상청 제공

제언·칼럼

해거름 지는 산길 진종일 쑥국새 울음소리 목이 쉬고 안개처럼 스미는 진한 쟈스민 향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짙은 초록 바람에 실려 온 그 향기는 밭 가장자리 울타리 삼아 심어 놓은 치자꽃에서 피어난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향기는 삘기 꽃 하늘거리는 언덕을 돌아 파랗게 물드는 흰 구름에 옮겨 탄다.

 

치자꽃 그 향기! 겨우내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상록의 짙푸름을 깔고 연초록 봄 받침을 하더니만 여름에 접어들자 순백의 도톰한 여섯 잎이 그리움의 진한 향을 피워올린다. 그리고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달착지근한 여운으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치자꽃의 꽃말은 한없은 그리움이다. 치자나무(Cape jasmine)는 꼭두서닛과(Rubiaceae)에 속하는 늘 푸른 넓은 잎 떨기나무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열대 및 아열대 식물로서 치자(梔子)라는 이름은 열매의 모양이 타원형으로 옛날 술 단지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다 한다. 치자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영국에 가데니아라는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있었는데 흰색을 너무 좋아해서 흰색으로 자신의 모든 걸 치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 어떤 열매를 주며 천국에서만 피는 꽃인데 화분에 심어 크게 자라면 키스를 하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진다. 가데니아는 그 열매를 심고 잘 가꾸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꽃이 피었는데 하얀 꽃잎에 너무나 우아하고 예쁜 꽃이었다. 키스를 하자 약속대로 나타난 천사는 당신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속삭이며 멋진 젊은이로 변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천사가 가져다준 이 꽃이 지상에서 처음 핀 치자나무(gardenia)라고 한다. 유월에서 칠월이 한창인 치자꽃은 향기가 맑고 그 향기에 마음의 근심을 사라지게 하니 청결이란 말도 어울린다.

 

치자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훼서적인 조선 시대 강희안의 양화소록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는 치자의 4가지 아름다움을 꽃 빛이 흰 것, 향기가 맑은 것, 겨울에도 윤기 있는 싱싱한 푸른 잎, 황금색 물감으로 쓰이는 열매를 꼽아 꽃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런 만큼 소박하면서도 야무진 치자꽃 향기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치자꽃 향기에 놓았던 정신을 챙긴다. 피어오르는 향기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유년의 파란 기억과 풋사과 같은 이십 대의 일들이 떠오른다. 놀거리가 없었던 유년 시절은 무척 무료했다. 들이든 밭이든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 어머니 치마꼬리만 따라다녔다. 애도 많이 태웠다. 장마가 끝나고 푸성귀나 거둔다고 나서는 어머니를 따라서 간 산밭 가장자리엔 치자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심심하다고 집에 가자고 성화를 끓이면 어머니는 치자꽃을 따서 삘기 줄기에 끼워 불어주며 돌리며 놀라고 하신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비탈진 밭 소나무 그날 아래 앉아 입바람을 불 때마다 돌아가는 치자꽃이 참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치자꽃만 보면 그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살아난다. 하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흐르는 법 이제는 그리움만 맴을 돌 뿐이다.

 

또 다른 치자꽃 향기가 돌리는 시간은 이십 대 초반에 첫 발령지를 남해의 어느 섬에 받은 분의 글이다. 『스물한 살 봄날 첫 발령지로 낯선 남해 섬 당도하니 파도보다 먼저 달려온 치자꽃 향기 나를 안으며 함께 살자 하네. 첫사랑 같은 황홀감에 젖어 물안개 같은 웃음 날리며 섬 노래 풍금으로 반주 맞추던 날들, 온몸은 치자 향에 취해 파도길 음계 따라 젊음의 꽃 피웠네, 올해도 어김없이 아파트로 이사 온 치자꽃 화분에 잃어버린 청춘이 다시 피네.』 그랬으리라. 필자의 첫 발령지도 이곳인 만큼 내 마음과 같음을 치자꽃을 보며 쓸어내린다.

 

치자꽃은 초여름 장마의 시작과 끝을 알게 해주는 꽃이다. 치자나무 첫 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되고 마지막 치자꽃이 지면 장마가 끝난다고 하였다. 장마가 시작되면 눅눅하고 우울해진다. 어르신들에겐 신경통이 도지고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고 한다. 그럴 때 치자 열매 진액과 하늘 수박을 막걸리에 넣어 마시면 효험이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도 기억난다. 민간요법의 하나이지만 한방에서 불면증과 황달 치료 소염, 지열의 효과가 입증된 내용이기도 하다.

 

사시사철 푸른 치자나무. 요즘은 가까운 곳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긴 장마지만 가끔 바람결에 실려 오는 치자 향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 청결과 더불어 한없는 즐거움과 그리움의 꽃말로 날리는 치자꽃 향기를 맡으며 내 몸과 마음은 신김치 냄새만 풍기지 않은 지 두려워진다. 혼란과 욕심이 드나드는 지금 치자꽃 향기 같은 순하고 정갈한 기억과 그리움이 넘쳐난다면 조금 더 향기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